시동생의 물통

시동생의 물통

꽁허브 0 329

난 요즘의 여자들과 달리 일찍 시집을 왔다.


요즘이야 능력만 되면 나이 40이 넘어도 시집을 안 가고 독신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총각들은 색시를 못 구하여 베트남이나 중국 혹인 필리핀 등의 외국 여자를 마치 무슨 물건마냥 돈을 주고 사서 데리고 오는 형편이다.


하지만 내 나이 20때는 적당한 혼처만 있으면 시집을 가기를 원하였고 보내려고 안달을 하였다.


그랬다.


내 나이 21살에 난 시집이란 것을 왔다.


오고 보니 시아버지라는 양반은 집안일이란 일은 모조리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밖으로만 나도는 한량이었다.


처자식이야 굶든 말든 한 번 집을 나서면 일주일은 보통이요 심하면 반년을 집에 연락 한 번 안하다가는


불쑥 나타나 시어머님이 고생고생을 다하여 농사를 지어 마련을 해 둔 돈을 챙겨서는 또 온다간다는


말없이 훌쩍 집을 비우는 예사였고 시어머님도 이에 이력이 났든지 시아버님이 나타나면 바로


고생고생을 해 모아둔 일부의 돈을 시아버님 앞에 내 놓는 것을 당연지사로 생각을 하였었다.


내가 죽은 우리 남편과 결혼을 하고 친정에서 시집살이를 위하여 처음 시가에 갔을 때는 시아버님은 계셨지만


이틀이 지나자 시아버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시어머님께 걱정스런 투로 어디에 가셨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모른다고 하시면서 때가 되면 돌아오겠지 하시며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하는 통에 놀라고 말았다.


시어머님은 평생을 흙에 살다 흙으로 돌아가신 그런 분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식구들 밥을 짓고 물을 길렀으며 식사를 마치면 새댁인 나에게 설거지만 하라고 시키시고는


밭이나 논으로 나가셨고 새참 때가 되면 다시 집으로 오셔서 손수 일꾼들 새참을 준비하여 나를 앞장세우고


논밭으로 나가 일꾼들에게(여기는 우리 남편도 포함이 되었음)새참을 먹이게 하고는 자신을 새참은 먹지도 않고


논밭을 갈기에 정신이 없다가도 다시 점심시간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와 일꾼들 점심준비를 해서는


다시 나를 앞장세우고 논밭으로가 일꾼들에게 점심을 먹게 하고는 정작 자신은 몇 수저 드는 둥 마는 둥 하기가 무섭게


다시 일을 하였고 점심 새참도 그렇게 하고 일꾼들이 집으로 돌아가고도 남편과 둘이 남아 해가 질 때까지 일을 하고는


어두워지면 집으로 오셔서 저녁을 드시고는 난의 피곤함에 졸리어 주무시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였지만


시어머님은 다시 어두운 20촉짜리 전등 밑에 앉아서 바느질을 하시거나 그도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만들어 하시다가는


자정이 너머서야 잠자리에 들 정도로 일 밖에 모르고 하나 뿐인 아들과 며느리의 뒷바라지하시길 무척이나 좋아 하셨다.


정말이지 내가 시집을 가고 거의 반년 동안은 고작 설거지만 나에게 시켰지 흙은 손에 묻히지도 못 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난 아들을 낳았다.


남들은 며느리가 아이를 해산을 하면 산후조리를 해 주기 싫어서 친정으로 가서 해산을 하고


몸조리까지 하고 오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우리 시어머님은 나의 해산은물론 산후 조리도 마다 안 하시고 손수 다 해 주셨다.


우리 아이가 3칠이 되든 날 우리 시가집에는 생각지도 못 한 엄청난 일이 생기고 말았다.


반년 전에 시어머님께 얼마간의 돈을 챙겨 나가시고는 모습은커녕 소식도 없던 시아버지가 핏덩이를 하나 안고 와서는


시어머님에게 맡기며 자기 아들이니 잘 키우라고 하시고는 다시 돈을 챙겨서 집을 나가버린 것이었다.


난 졸지에 내 아들보다 늦게 태어난 시동생을 두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시어머님의 행동이었다.


시어머님은 내가 내 아들의 젖을 먹이고 있는데 그 핏덩이 시동생을 품에 안고 들어와서는 나에게 젖동냥을 구걸을 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시아버지에 대한 욕은 한 마디도 안 하였다.


다행이 젖이 잘 나와 난 졸지에 아들과 시동생에게 번갈아가며 젖을 먹이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봄 병든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시아버지는 병석에 누었고 그해 가을에 운명을 하였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난 다시 한 번 더 놀라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여 나에게 그렇게 잘 해주었던 영감이었지만 병원에서 암이란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을 하여


7개월을 끌다가 숨을 거두자 눈물이 나기는커녕 잘 죽었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시집을 와서 거의


30년을 애만 먹이든 남편이 죽자 아들인 우리 남편은 눈물도 안 흘렸지만 정작 고생고생을 다 한


우리 시어머님만은 대성통곡을 하였고 그 못 난 영감도 영감이라고 장례를 치르고는 병석에 눕더니 그 다음해 봄에 시아버님 곁에 묻히고 말았다.


그러자 남편과 난 시동생을 아들과 함께 키워야 하였다.


남편은 어미가 누구인지 모르는 애 그냥 고아원에 보내자고 하였으나 시어머님 살아생전에 내 손을 잡으시고는


나에게 시동생을 잘 키워 달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난 남편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시동생을 아들과 함께 키웠다.


그뿐 아니라 남편은 아이를 더 낳자고 하였으나 난 시동생도 아들처럼 생각하며 키우려면 둘이면 충분하다고 하고


거절을 하고 아들과 시동생에게만 온 정성을 쓰며 농사일을 하며 시골에서 그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아들은 학교에 가서도 공부고 운동이고 간에 뭐든 항상 최 상위권에서만 들었지만


이상하게 시동생은 병약하여 공부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자기 몸 관리에도 급급하여 거의 꼴찌에서 맴돌았습니다.


그러니 아들은 자기 삼촌인 저의 시동생은 시쳇말로 쪼다 취급을 하였고 삼촌이라고 부르기는커녕


다른 아이들 앞에서 자기가 선두에 서서 놀리는 지경이었지만 제가 아무리 타일러도 저의 아들은 그때뿐이었습니다.


하나는 내가 배를 아파 낳은 친 아들이고 하나는 한 대가 먼 시동생이었지만 사람은 항상 약자 편에 선다고


저는 아들의 편에 들기보다는 시동생을 두둔하며 격려를 더 하였으면 더 하였지 아들의 편에는 잘 서지 않았습니다.


그 탓에 아들은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거기 여자와 결혼을 하면서도 우리 부부 상의하기는커녕


결혼식을 올리고서야 일방적으로 결혼을 하였다고 통고만 하였으며 좋으나 싫으나 자기의 핏줄인


아버지가 임종을 하였다고 연락을 하였어도 오지는 안 하고 몇 푼의 돈을 부쳐주며 장례비에 보태어 쓰라고 하고는


이제 다시 연락을 하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청천벽력 같은 편지만 한 장 달랑 보내고 말았습니다.


정말이지 허무하였습니다.


경황이 없이 장례를 치르는 와중에 시동생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지 저의 아들이자 시동생 자신에게는


조카에게 전화를 하였더니 외국 말을 하는 남자가 받더니 그런 사람은 없다는 말만 하고 끊더랍니다.


이렇게 된 것이 모두 아들을 생각 안 하고 병약한 시동생은 편애한 결과이니 모두 저의 잘못이지요.


하여간 병약한 몸이었지만 시동생은 그래도 잘 자라 주었습니다.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며 서울로 유학을 보내주지 않는다고 몇 날 몇 칠을 단식투쟁을 한 아들과 달리


시동생은 시골의 고등학교에 보내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한다면 아버지뻘의 남편과 엄마뻘의


나에게 큰절을 올리기도 하였으나 우리 부부는 형편이 어려워 아들만 서울로 유학을 보내고 시동생은


우리가 데리고 있었는데 시동생은 학교가 파하기 무섭게 집으로 달려와 우리 부부의 농사일을 거들었습니다.


시동생은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고부터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에 비하여 훨씬 건강은 좋아졌고 공부도 하려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배운 것이 별로 없는 저의 소견이지만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기초가 잘 다져 져야 고등학교에 가서도


그 기초를 바탕으로 공부를 해야 성적이 올라가게 마련인데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면서 워낙 병약한 탓에


기초를 못 쌓아 기초가 없었던지 해 보려고 노력은 하였지만 성적은 그렇게 썩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약은 달아 놓고 학교에 다녀야 하였지만 아들을 서울로 유학을 보낸 탓에 살림살이가 어려워 건강검진은커녕


정확한 진찰도 한 번 못 시켜보고 겨우 입이나 먹이고 학교나 보내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아들은 고등학교에서 바로 미국의 대학교로 유학을 갔습니다.


이 역시 우리에게 한 마디 상의도 안 하고 유학을 가기 두 달 앞에 유학을 간다고 하며 얼마간의 돈을 마련을 해 달라고 하였고


어쩔 수 없이 땅이며 논을 팔아 그 돈을 마련을 해 주었더니 간다는 말 한 마디 안 남기고 마치 빚쟁이가 도망을 치듯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 버리고 말았을 때는 우리 부부가 시동생 목으로 남겨둔 약간의 논밭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건강에 이상이 왔습니다.


또 동시에 징병검사를 받았던 시동생도 병약한 몸이라고 병역면제를 받았습니다.


시골에서 병원까지 통원치료를 하기에는 너무나 무리였습니다.


시동생도 형님이 건강에 이상이 생기자 자기 목의 전답을 처분하여 도시로 나가자고 하였습니다.


남편의 건강도 문제이지만 전답을 처분을 한 돈은 당연히 시동생의 목이었기에 시동생도 건강검진을 받게 하였습니다.


남편은 간암 말기란 판정을 받았습니다.


또 엎친데덮친 격으로 시동생은 위장과 간 폐 그리고 신장까지 정상이 아닌 의사 선생님 말씀처럼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었습니다.


남편은 입원도 필요가 없고 마지막으로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해 달라는 것을 다 해주고 보내는 도리 밖에 없다고 하였으며


시동생은 조용한 곳에서 요양을 시키며 약을 먹이면 어느 정도 차도는 보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시동생의 목인 전답을 처분한 돈과 우리 남편 소유의 집과 나머지 약간의 전답 그리고 야산을 처분한 돈으로


우리는 도시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바닷가의 폐가에 가까운 집을 아주 싸게 구하였고 약간의 밭도 샀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7개월 만에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미국으로 유학을 간 아들은 소식마저 두절이 된 상태이고 남편은 죽고 남은 것은 오직 시동생과 저 단 둘이 뿐이었습니다.


억척같이 시동생과 저는 밭을 경작하였습니다.


부지런한 시동생 덕에 금전 걱정은 안 하고 살 수가 있었습니다.


새벽에 눈을 뜨면 뜨자마자 눈을 비비면서도 먼저 밭으로 나가 일을 하다가 제가 아침을 지어놓고


부르면 와서 함께 식사를 하고는 잠시 쉬었다가 약을 먹고 곧 바로 밭으로 나가면 저도 함께 따라 나가


일을 하다가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허리를 펴고 집으로 와 밥을 먹고 다시 잠시 쉰 다음 약을 먹기 무섭게


일을 나갔다가 어둠이 내리면 집으로 와 저녁을 먹을 정도로 시동생은 부지런하였고 믿음직하였습니다.


우린 외딴 집이었지만 조금 떨어진 동네 사람들은 시동생을 마치 머슴 부리듯이 부린다고 하였고


우리의 작은 밭은 일 년 열두 달 하루도 거르지 않고 채소나 과일 아니면 다른 농작물이 심어져 있어


나를 보고 시동생을 부리듯이 땅도 부려먹는다고 말하면서도 타지 사람인 우리를 많이 도우려고 애를 써 주기도 하였습니다.


또 우리의 농사 기법을 배우려고 하였습니다.


시동생은 농사에 관한 서적을 사서보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저자에게 직접 편지나 전화를 하여서 알아냈고


그런 결과 농약 한 방울 안치고 화학비료 한 주먹 뿌리지 않고 완전히 무 농약 무 화학비료 농사를 지은 덕에


우리가 출하하는 농산물은 다른 집의 농산물에 비하여 월등히 많은 돈을 받을 정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도련님! 도련님 왜 그래요?”작년 여름의 일이었습니다.


평소처럼 시동생은 점심을 먹고 잠시 쉬고 약을 먹고 비닐하우스가 쳐진 밭으로 갔습니다.


설거지를 마치고 따라 나갔더니 비닐하우스 안에서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쓸어져 있었습니다.


“으~~~형수님 물”시동생은 물을 찾았습니다.


“도련님 여기”물병을 입에 대 주자 조금 마시더니 일어났습니다.


“도련님 우리 좀 쉬었다 해요”간청을 하였습니다.


“네 형수님”시동생은 마지 못 해 잠시 비닐하우스 밖으로 나와 쉬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일을 하였습니다.


저녁을 조금 일직 먹자고 하여 일직 집으로 왔습니다.


저녁을 먹고 일찍 자라고 하였더니 웃으며 피곤해서 안 그래도 일찍 자려고 하였다고 하며 방으로 갔습니다.


TV를 보다가 이상한 신음소리에 놀라 시동생 방으로 갔습니다.


“엄마! 엄마!”시동생이 낮에처럼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손을 허공을 향하여 내 젓고 있었습니다.


“도련님, 도련님 정신 차려요, 정신”마구 흔들었습니다.


“엄마 우리 엄마”시동생이 저의 품으로 파고들며 소리쳤습니다.


“그래 상수야 정신 차려, 정신”저의 젖을 먹여 키운 시동생이지만 이름을 잘 부르지는 않았지만


어쩌다가 농담을 하면서는 이름을 불렀으나 농담이 아니게 부른 것은 그때가 아마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엄마 우리 엄마”시동생은 계속 엄마만 찾으며 저의 가슴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그래 엄마야 상수야 제발”전 시동생을 마구 끌어안고 흔들며 시동생 이름을 불렀습니다.


시동생은 저의 가슴으로 파고들며 임으로 무언가를 빨려고 하였습니다.


축 늘어져 볼품이라고는 전혀 없는 젖가슴을 들어내고 시동생에게 젖을 물렸습니다.


나오지 않는 젖꼭지였지만.........


뭐라고요?


시동생에게 젖꼭지를 물린 년이 어디 있냐고요?


앞에서도 말을 하였지만 갓난아기 때부터 제 젖을 물려 먹이고 키운 시동생이 아니든가요?


시동생은 나오지 않는 젖꼭지를 빨면서 젖가슴을 매만졌습니다.


잠잠하였습니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시동생 머리맡에 있던 휴지로 시동생이 흘린 땀을 닦아주었습니다.


“혀........형..........수........님”시동생이 눈을 뜨고 놀라며 올려다봤습니다.


“더 먹어요, 어서”저의 눈에는 시동생이 갓난아이로 보여서 시동생의 머리를 당겨 젖꼭지를 시동생 입에 물려주었습니다.


“쪽~쪽~쪽”시동생은 나오지 않는 젖꼭지를 빨며 다른 젖가슴을 주물렀습니다.


“아~흑”시동생은 남자였습니다.


마구 정신없이 주무르던 시동생의 손길이 정신을 차린 후에는 아주 부드럽게 젖가슴을 주물렀습니다.


이제 정신이 없어진 것은 시동생이 아니라 저였습니다.


시동생의 젖가슴을 주무르던 손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저도 모르게 저는 시동생의 이불 위로 눕혀졌습니다.


그리고 시동생의 몸이 재 몸 위로 포개어졌습니다.


딱딱한 시동생의 그것이 감촉을 느끼게 하며 저의 거기에 닿았습니다.


얼굴을 붉히며 외면을 하였습니다.


저의 치마가 올라갔습니다.


이제 팬티와 시동생의 파나마 그리고 팬티만의 사이로 딱딱한 시동생의 그것 감촉이 느껴졌습니다.


“아~”갑자기 밑이 허전하였습니다.


시동생이 자신의 하체를 들어 올린 것이었습니다.


허전함을 달래려고 젖꼭지를 물고 있던 시동생의 머리를 두 손을 힘주어 끌어안았습니다.


다시 시동생의 딱딱한 그것의 느낌이 전하여졌습니다.


금방의 그 느낌과는 전혀 다르게 더 딱딱한 느낌이 그대로 저를 전율케 하였습니다.


“아~흑 이럼 안 돼”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저는 시동생의 엉덩이를 두 발로 감았습니다.


시동생의 손이 팬티에 닿았습니다.


그리고 내려갔습니다.


“도........도련님”하고 부르면서도 저의 손을 시동생의 팬티를 밑으로 내리는 손을 잡기는커녕 오히려 엉덩이를 들어주었습니다.


팬티가 엉덩이를 빠져나오자 시동생이 발로 팬티를 더 밑으로 내렸습니다.


시동생의 엉덩이에 감긴 발을 바로 내렸습니다.


저의 팬티가 발목에 걸렸습니다.


제 스스로 팬티를 발로 걷어서 뺐습니다.


동시에 시동생의 따스하고 딱딱한 그것이 제 거기에 맨살로 자극을 하였습니다.


다리가 그대로 벌어졌습니다.


남편이 아닌 저의 젖을 먹이며 키워온 시동생의 그것이 제 거기 안으로 미끄럽게 밀려들어왔습니다.


“도련님 이럼 안 돼”참 더러운 년이었습니다.


가슴을 밀치며 거부를 하며 말을 하여야 할 년의 다리는 시동생이 빼면 어쩌나 싶었든지 엉덩이를 감았습니다.


정말이지 뿌듯한 느낌이 거기로 느껴졌습니다.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니야”하지만 저의 젖을 먹고 자라며 하나가 되었던 시동생이 이제 시동생의 물건이 제 거기로 들어와 하나로 만들어 져 있었습니다.


죽은 남편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남편의 그것에 비하면 느낌이 훨씬 좋았습니다.


“형수님 좋아?”시동생이 젖꼭지에서 입을 때고 물었습니다.


“모.......몰라”외면을 하였습니다.


“이제 기절은 안 해도 되겠다. 그치?”시동생이 이상한 말을 하였습니다.


“............왜?”간신히 되물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딸딸이를 쳐 주면 되는데 일을 하다 보면 잊어버리는 수가 있거든”시동생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습니다.


“딸딸이가 뭔데?”기절을 안 한다는 말도 이상하였지만 딸딸이가 뭔지 몰랐습니다.


“에~이 바보 좆 물을 남자 혼자서 빼려고 흔드는 것도 몰라?”시동생이 천천히 엉덩이를 움직여 저의 거기를 자극 주며 말을 하였습니다.


“정액을 자주 빼면 기절 안 해?”난 놀라며 시동생 얼굴을 잡고 물었습니다.


“응”웃으며 대답을 하였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었든 말은 언제든지 빼야 할 때는 저의 몸에 빼라는 말이었습니다.


“형수 이제 형수 여기에 이렇게 빼도 돼?”시동생이 깊게 찌르고 물었습니다.


“몰라”시동생은 제 속에 들어갔다 나온 모양이었습니다.


제 마음을 뻔히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형수 물받이가 되어 줄 거지?”시동생이 물었습니다.


“몰라, 모른데도”눈을 흘기며 말을 하곤 외면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속마음은 시동생이 건강하게만 살아준다면 물받이가 아니라 물통이 되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퍽퍽퍽,퍼-억,퍽퍽,퍽퍽”제 물받이에 물을 부어줄 시동생이 물건이 천천히 움직이며 물을 뿌린 준비를 하였습니다.


“하……..하…….하아…하……아”저도 그만 흥분을 하는 마음으로 시동생의 물을 받을 준비성 신음을 하였습니다.


“퍽~퍽~ 으~음~~~~퍽~음~~~~퍽~퍽~음음음……퍽퍽…….학학학”혼절 끝이라 힘들어하였습니다.


“아흑~~~음~~~음~~~`음~~~아~흑~~어떻케~~~어~~떻~~케~~이젠~~아~~이젠”저의 거기는 시동생의 물을 받을 준비가 완료 된 상태였습니다.


“퍽억,퍽퍽퍽퍽 퍽---퍽---퍽!,퍽퍽퍽”시동생은 숨을 고르고 물을 뿌릴 준비 운동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아~아~음~~~~~~ㅎ~~~흠~~~~~음음음~~~~ 아후~ 어떡허니~~~아~~하흑”남편의 물을 받은 후 처음으로 물을 받을 준비성 신음이었습니다.


“퍽. 퍽…질퍽... 퍽.. 질. 퍽 .. 질퍽. 질퍽”질퍽이는 소리는 받을 준비가 다 되었음을 증명하는 소리였습니다.


“아…!………..하”숨이 턱에 찼습니다.


“퍽억,퍽퍽퍽퍽 퍽---퍽---퍽!,퍽퍽퍽”열심히 고생을 하는 시동생을 위하여 저 역시 엉덩이를 따라서 흔들어주었습니다.


“음…음…..아….아…그래….조금세계…..음..음....음음…그래…그렇게….음…음”조금이라도 빨리 시동생의 물받이로 인정을 받고 싶었습니다.


“퍽억,퍽퍽퍽퍽 퍽---퍽---퍽!,퍽퍽퍽!!!!!!!!!!!”시동생도 저의 물통을 채우려고 부단히 노력을 하였습니다.


“아…….. 음…아….아…………..아……어떡해…아…아…어떡하니…음…음……음”시동생의 물통이 된다고 생각을 하니 황홀하였습니다.


“퍼~벅! 타~다닥 퍽! 철~썩, 퍼~버벅! 타~다닥”자궁 입구까지 찌르며 물을 뿌릴 준비를 하였습니다.


“아……아……음…음………음……음…..아…그래…….아…..아..천천히…..천천히해…천천히해”시동생이 힘들어 해 보이는 모습이 안쓰러웠습니다.


“퍼~벅! 타~다닥 퍽! 철~썩, 퍼~버벅! 타~다닥”그러나 시동생은 저의 축 늘어진 젖가슴을 짚고 열심히 물통을 채우려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아….아….음…조금만 천천히 ....음..됐어…해…..음…음”행여 물통을 채우지도 못 하고 혼절을 할지 몰라 두려웠습니다.


“퍼~벅! 타~다닥 퍽! 철~썩, 퍼~버벅! 타~다닥”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시동생은 웃으며 뿌릴 준비운동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하…….하…….흠………흠…………하……….하……….하………………흠”숨을 쉬기도 곤란하였습니다.


“퍽퍽퍽, 퍼-억,퍽퍼윽, 퍽-억,퍽-억!,퍽퍽퍽퍽!!!!!!!!!!!!”빠르게 흔들었습니다.


“악악…..아……더…더…더 빨리 악악…악…그래 거기..거기…..거기 거기”저도 모르는 말이 제 입에서 마구 나왔습니다.


“퍽! 퍽! 퍽! 퍽퍽퍽퍽퍽! 퍽퍽퍽! 퍽퍽퍽퍽퍽퍽!!!!!!!!!!!!!!!”시동생은 제 거기에 불을 지르고 자신의 물로 그 불을 끌 모양이었습니다.


“악…악……아….미치겠어…악…악….악…..어쩌니 ..어쩌니…악…악”불이 나고도 물을 못 뿌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퍽,퍽퍽, 철썩,퍽퍽퍽,철썩”다시 천천히 자극을 주었습니다.


“아흑~~아아아……악…아……….”두 손으로 시동생의 엉덩이를 잡았습니다.


“퍽퍼퍽, 퍽퍽!!!!!!!!!!!!!!!!!!!!!!!!!, 퍼억,푸욱 으~~~~~~~~”갑자기 빠르게 움직이더니 깊이 넣고 힘없이 제 젖가슴 사이로 고개를 박았습니다.


“정신 차려 정신 아~~~~~”그게 아니었습니다.


시동생이 물통에 물을 부어주고 있었습니다.


따스하고 정감이 넘치는 물을 말입니다.


“형수 좋았어?”시동생이 젖꼭지를 매만지며 물었습니다.


“몰라 바보”저는 시동생의 볼을 꼬집고 흔들며 말을 하였습니다.


“언제든지 되지?”시동생은 물받이에 물을 채우며 물었습니다.


“얼마든지”저는 제 젖을 빠는 시동생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저는 시동생의 훌륭한 물통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또 그 후로 시동생은 단 한 번도 혼절을 안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의 매일 물통을 채우려고 하기에 걱정입니다.


이번에 딸기 끝물만 내면 보약이라도 한 제 달여 먹일 계획입니다.


어미 애비 나 몰라라 하고 자기 살길로 간 아들에 비하면 시동생이 더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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